[중앙일보 왕희수 기자] 경호업체 사장인 고은옥(28)씨의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야전지휘관이었다. 동네 남자 아이들과 놀이를 해도 늘상 대장 역할을 했던 그에게 '졸병'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그는 이같은 꿈을 10년 전에 접어야만 했다. 고씨가 고교를 졸업할 1996년엔 3군 사관학교에서 여자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경호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1m70㎝가 넘는 훤칠한 키에 태권도 4단, 경호무술 4단, 용무도 4단 등 합계 12단의 무술 실력을 갖춘 고씨는 한 경호업체에 입사했다.
"10년 전만 해도 여자가 경호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엽기였어요. 회사 내에서도 '여자가…'하는 분위기 때문에 일을 맡지 못했어요."
간부들을 졸라 간신히 얻은 첫 임무는 인기 가수 경호였다. 공연장 출입구에 몰려드는 청소년 팬들을 저지하느라 온몸이 멍투성이가 됐지만 실력은 인정받았다. 이후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 미국 영화배우 톰 크루즈 등 거물을 비롯해 1000여 명을 경호하며 국내 베테랑 여성경호인의 자리에 올랐다.
고씨는 2003년 말 퍼스트레이디라는 경호업체를 창업하며 독립했다. 자신의 '병력'을 거느린 야전지휘관이 된 것이다. 이 회사는 직원 20명 전원이 여성이다. 국내 약 2700개의 경호업체 중 유일하다. 과연 여성만 있는 경호업체에도 일감이 들어올까.
"여성 경호원은 특수한 수요가 있습니다. 시위를 하는 여성들을 잘못 저지하다가는 성폭행 혐의를 받을 수도 있잖아요. 또 연예인, 정치인, 이혼소송 중인 주부, 스토킹을 당하는 여성, 유괴를 걱정하는 부유층 자녀 등 상당수가 여성 경호원을 선호합니다. 체구가 큰 남자 경호원들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지요."
고씨는 꼼꼼하고 대하기 편하다는 여성 경호원 특유의 장점 때문에 업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된 시장을 확보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개인 경호 프로그램을 상품화해 TV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등 사업 수완을 발휘하며 최근 한국여성경제인회와 한국여성벤처협회 등으로부터 '주목받는 여성 경영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업과 함께 학업에도 힘을 쏟아 석사학위를 취득, 포항1대학 강단에도 섰다.
고씨는 국내 최초의 '사설탐정'이기도 하다. 정식 명칭이 '민간조사원'인 사설탐정은 현재 극히 제한된 부분에서만 활동이 가능하지만, 국회에서 그 역할을 확대하는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보험.교통사고.사이버범죄 등의 분야에서 공권력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분쟁이 많아지고 있어요. 민간조사원들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지요."
고씨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 '미녀 삼총사'의 주인공들처럼 여성 탐정의 맹활약을 볼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