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 사건은 한·일관계를 수교 이래 최악의 사태로 몰고갔을 뿐 아니라 정치적 후폭풍도 폭발적이었다. 특히 이 사건은 이른바 차지철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가 됐다.
사건 8일 후인 22일 이른바 ‘피스톨 박’으로 상징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던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은 그 자리를 차지철 국회 내무위원장에게 물려준다. 15년 남짓 누려온 ‘대통령의 오른팔’ 지위를 내준 것이다.
박실장은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를 맡은 이래 63년 경호실 창설시 차장 취임에 이어 실장으로 승진하면서 2인자 역할을 해왔다.
이후 차실장은 별도의 정보라인을 운영하면서 중앙정보부의 보고를 가로채는 ‘월권’을 하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중앙정보부장의 위상은 쪼그라들고 경호실장은 팽창하는 권력중심 이동이 생기게 됐다는 게 당시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8·15 사태는 또한 공화당 정권의 권력이동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피스톨 박’ 인맥이 땅을 친 반면 차지철의 사람들은 하나 둘 권력실세 자리에 오르기 시작했다. 후폭풍은 5·16 거사 후 숱한 외유 등 부침 끝에 철옹성을 구축했던 김종필 총리는 물론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김정렴 비서실장 등에게도 타격이 컸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물러난 자리에 임명됐던 신직수씨가 이 사건으로 옷을 벗게 되면서 그 자리에 오르는 인물이 바로 10·26의 주인공 김재규다.
당일 경축식 의전을 맡았던 양택식 서울시장 역시 이 사건의 불똥으로 사퇴한 경우다.
양시장은 사건 당시 단상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보도 이후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자리를 지키다가 열흘 만에 사표를 냈다. 그는 김용태 총무가 “사임해야 마땅하다”고 질타한 지 1주일 만인 9월3일 자리에서 물러났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도 소수의 충성파에 대한 의존이 심해졌고 정치적인 무리수가 남발했다.
1975년 5월에 나온 긴급조치 9호는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왜곡된 권력구조와 무리한 정책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은 79년 10·26의 토양이 됐다는 시각도 있다.
